박지원 Dec 03, 2018 10: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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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첫사랑은 그 존재로 늘 뒤의 사랑들에 영향을 미친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의 기억은 있다. 첫사랑이라는 것은 그 존재만으로 지나치게 미화되어 아름답게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케이시 폴은 본인의 기억에 의존해서 과거의 첫사랑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의 사랑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지만, 당시의 이야기를 할 때, 과거는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음이 분명했다.

 

 ‘케이시 폴의 첫사랑과 함께 나의 어린 시절 첫사랑도 되돌아보았다. 200571,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여자 친구와 만남을 시작했다. 마냥 좋기만 했던 나와 여자 친구는 학교에서 항상 언급되는 장수 커플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줄곧 같은 동네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내게 된다.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아 우울해서 만나면 기분이 풀어져서 좋고,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해서 좋았다. 대학에 합격했던 당시에 얼싸안고 울고불고 좋아했던 우리는 20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불안했지만 애틋함으로 잘 지내왔고, 이 여자 친구와는 평생 함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군대에 입대해서 전역을 6개월 앞둔 그 날 우리는 이별했다. 만남을 시작한지 10년째가 되던 해였다.

 

 결코 좋은 이별은 아니었다. 인생의 절반이 사라지던 날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난 지금 첫사랑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 기억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케이시 폴의 첫사랑은 여자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자신의 삶도 무너지게 되는 비극적인 결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억에는 그대로 애틋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아마도 케이시 폴이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현재 사랑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나도 새로운 사랑을 해보았지만, 과거의 사랑은 분명히 영향을 미친다. 첫사랑을 하면서 함께 좋아하게 되었던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노래를 지금도 좋아하고 있고, 새로운 여자 친구도 그 가수의 노래들을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그런 마음인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랑 이야기가 상대방에게는 어떻게 남아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기억으로는 어딘가 텅 비어있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케이시 폴의 첫사랑은 가정이 있는 48세의 유부녀였다. 그렇다면 그녀가 느꼈던 사랑은 어떤 것일까?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인지, 아니면 자신을 학대하던 남편에게서 도망치기 위한 수단은 아니었을까? 그녀는 가정을 버리고 새로운 사랑을 하면서 남편과 폴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된다.

 

 내 첫사랑의 기억을 그 여자 친구와의 기억과 맞춰보면 얼마나 잘 맞을까? 분명히 모든 순간의 내 행동과 생각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커플로 묶여서 언급되는 것이 부담되어서 관계를 이어올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대학에 진학해서 수원과 부산이라는 먼 거리가 지독하게 싫지만, 이를 숨기고 잘 해보려고 노력했지만 가까워질 기미도 보이지 않고, 군대로 가버렸으니 얼마나 허탈했을까. 여자 친구는 거리가 멀어진 만큼 관계를 유지하고자 더 큰 노력을 했지만, 나는 관계에 대한 노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게 쌓이고 쌓이다 보니 견디지 못하고 10년이라는 그 긴 시간을 처분해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기억은 기억하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 정리되고 걸러진다.” 이별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여자 친구는 부정적인 요구들로 걸러진 안 좋은 기억만 남아있을까? 누군가 사랑할 때뿐만 아니라 어떤 관계든지, 상대방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훗날 어떻게 기억될지 생각하면서 행동한다면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 같다. 이 생각으로부터 상대방을 항상 배려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10년이라는 긴 첫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나에게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고향 집에 내려가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 길들을 걷다 보면, 교복을 입고 함께 걷던 길, 밤이 늦은지도 모르고 앉아서 이야기 나누던 벤치들이 보여서 걸음을 일부러 천천히 걷게 된다. 이렇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 그 친구를 생각하면서, 나도 다른 사람의 기억에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행동할 수 있다면 첫사랑의 기억이 아프면서도 고마운 경험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