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 Dec 04, 2018 11:51:35
0 10

3층 서기실의 암호

전 영국주재 북한 대사관 외교관 태영호 저

 



     이른바 탈북 하여 대한민국에서 온 사람 중에서 가장 고위급 인사라고 알려져 있는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가 책을 냈다. 통일부 망명 회견장에서 대뜸 자리에서 일어서며 "자유대한민국 만세"를 외친 그 강렬한 장면이 점차 뇌리에서 어렴풋해질 즈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난 뒤 어이없게 불어 닥친 '평양냉면 붐'이 사그라질 즈음이었다. 태영호 공사의 책은 그야말로 나에게 핵무기급의 임팩트로 다가왔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다. 애써 외면하거나,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고, 이른바 '평화'를 방해 한다던가 북한의 심기를 자극한다던가 하는 부류의 주장들도 당연히 보인다.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는 사람들, 어쩌면 외면하는 것일 수도 있는 사람들이 평화 이야기는 깊은 생각 없이 잘 꺼낸다.

 

     내가 태 공사의 책에서 조금 놀랐던 것은 북한에서 이른바 빨치산 가문의 출신성분 좋은 그가 김정은의 형을 런던에서 전담마크한지 얼마 안 되어 대한민국으로 망명해 왔다는 것도 하나이지만, 책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우리가 단순히 '평화통일'의 미사여구에 사로잡혀 미처 보지 못했던 북한의 실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서 든 생각은 김정은이 버젓이 버티고 있는 한 평화통일은 당분간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아니, 요원하다기 보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을 북한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오랜 친구 같아 보이려는 건 대북정책의 연장선일까) 최근의 정상회담 이후 젊은 층 사이에서 김정은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고 있다고 한다.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지만 겪은 이후엔 되돌릴 수 없단 점이 심히 걱정이다.

 

     평화는 한쪽이 퍼주는 것이 아니고 한쪽이 구걸하는 것은 더욱이 아니다. 불행히도 대한민국은 지금껏 대북 스탠스를 이렇게 유지해 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과 만난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내심 기대를 했다. 그리고 정상회담이 끝난 지 20여일 후 북한은 여전히 고자세로 대한민국과 세계를 손아귀에 쥐려하고 있다. 김일성의 독재체제 이후 북한은 변한 게 전혀 없으나 대한민국만 부화뇌동하고 있다. 지난 1월 남측 대통령 특사는 김정은을 배려, 리더십, 여유, 숙성된 고민, 솔직하고 대담등으로 평가했고, 4월 정상회담 뒤 언론과 온라인에서는 뚱뚱하고 귀엽다’ ‘솔직하고 담백하다’ ‘알고 보니 좋은 사람이다’ ‘생각보다 무섭지 않다’ ‘소탈하게 잘 웃는다는 찬양 일색의 인물평이 나왔다. 그가 고모부를 대공 기관총으로 처형했다는 뉴스는 까맣게 잊고 있다. 천안함 침몰, 연평도 포격, 서해교전 등 천인공노할 일들이 불과 몇 년 전에 행해졌었다는 사실도 잊고 있다.

 

      놀랍게도 태 공사는 본인의 저서에서 북한이 절대로 단독 비핵화를 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북한 외교가 강한 이유는 벼랑 끝 외교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기본적으로 그들의 외교는 생존을 목표로 한다. 한미와의 정책 협상 등에서 그들은 전 세계를 상대로 시간 끌기식 기만극을 수도 없이 많이 해왔고, 이 같은 사실들은 태 공사의 저서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아직까지 많은 한국 사람들은 북한을 거쳐 한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대륙횡단고속철도 공사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심지어는 투자까지 하려하고 있지만 북한 내에서는 이미 폐기된 정책과 다름없다. 현실적으로 북한의 동해북부선을 철도의 일부로 사용하는 것이 최적의 노선이지만 한국전쟁 시 인천상륙작전을 패인으로 생각한 북한은 전후 수십 년간 동해북부에 방어부대를 건설해왔다. 그렇기에 러시아와 한국이 언제든지 지원할 의사가 있었다고 오래 전 발표했지만 군사시설의 대대적인 이전으로 비롯될 엄청난 비용을 감당치 못하는 북한은 군부의 반대를 주로 하여 자연히 힘을 잃었다. 하지만 지금도 북한은 한반도 종단철도 건설이 가능한 것처럼 한국과 러시아에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물론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한국이나 러시아가 북한 동해안에 무수히 산재한 부대 이전 비용까지 전부 부담한다면 말이다.

 

     불편한 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자. 평화. 강력한 힘과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북녘 땅에 자유의 물결과 번영이 찾아오는 날, 평화통일은 완성되는 것이다. 북한은 나라 전체가 오직 김정은 가문만을 위해 존재하는 노예제 국가다. 따라서 한반도의 통일은 북한 주민을 노예사회에서 해방시키는 노예해방 혁명이다. 북한 주민에게 인간으로서의 고유한 권리를 되찾아주는 것이 통일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체제와 이념을 하나로 통일하고 민족 문화와 동질성을 융합하는 것은 그 이후의 가치다. 노예 상태인 북한 주민들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미국의 남북전쟁처럼 물리적인 방법을 쓸 수는 없지만 한반도의 노예해방의 싸움은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통일의 주체를 북한 주민으로 보아야 한다. 북한 주민은 자체로 일어날 힘과 의식이 있고 이미 엄청난 정보가 북한으로 들어가고 있다. 북한 내부의 변화는 이미 진행형이다. 그 변화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속도로 올 것인지가 문제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평화에 대한 간디의 말과 영국 자유주의를 대표했던 정치가이자 내가 좋아하는 존 러셀의 말을 인용한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마하트마 간디-

 

평화가 명예와 함께 유지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평화가 아니다.

-존 러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