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중 Dec 05, 2018 18:4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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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최근 퇴근길에 라디오를 듣다가 인상적인 오프닝 인사말을 듣게 되었다. 어느 의사가 정신적인 아픔을 겪는 환자에게 걷기라는 처방을 내려주었다는 이야기인데, 처방은 단순했다. 집에서 병원까지 일주일간 쉬지 않고 걸어서 도착하라는 것이다. 환자는 자신에게 맞는 리듬과 호흡을 느끼며 걷기 시작했고, 끝과 목적이 확실한 걸음을 행하며 나아가는 것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의사는 그렇게 일주일을 걸려 도착한 그에게 모든 병이 나았노라고 말했다. 올해 마라톤을 경험하며 달리기에 재미를 느꼈던 나는 걷기, 달리기, 먹기와 같은 단순한 행위들이 우리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었다. 걷는 사람, 하정우는 걸어서 출퇴근하는 국민배우 하정우가 쓴 에세이다. 무명시절부터 성공한 배우, 감독, 그리고 개인 전시를 여는 화가로 다양한 활동을 하기까지 그가 고수해온 걷기에 대한 생각을 엿보기로 했다.


그에게 걷기란,

두 발로 하는 간절한 기도

나만의 호흡과 보폭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

아무리 힘들어도 끝내 나를 일으켜 계속해보는 것


걷기가 나만의 호흡과 보폭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라는 표현이 인상 깊었다. 이 말은 누구보다 자신을 존중하고 믿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만큼 자신에 대한 존중과 믿음은 부족한 것 같다. 단순히 걷는 것 뿐 아니라 일이든 휴식이든 자신의 리듬을 생각해보지 않았고, 다른 리듬을 가진 성공한 사람들을 보며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만 했다. 걸으며 자신만의 보폭과 호흡을 음미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에게 있어 걷기란 단순한 운동, 이동수단을 넘어서 숨 쉬고 명상하며 자신을 돌보는 방식이었다.


글쎄, 언제부터였을까? 돌아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걷기밖에 없는 것만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연기를 보여줄 사람도, 내가 오를 무대 한 뼘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 안에 갇혀 세상을 원망하고 기회를 탓하긴 싫었다. 걷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과거의 어느 막막한 날에도, 이따금 잠까지 줄여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지금도 꾸준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것.


읽다보면 성공한 배우라고 인식되는 하정우도 역시나 막막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배우로 성공했음에도 감독이 되기 위한 도전과 실패가 그가 무명시절의 막막함 만큼이나 힘겹게 다가왔다는 점도 놀랍다. 멀고 험하지만, 영화에 대해 깊이 이해하기 위한 길로 가보려는 것이다. 그의 행보는 분명 진지하고 치열하다. 사람들은 그렇게 희망적이지만은 않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한 발 한 발 걷기 시작한다. 굳이 출퇴근을 걸어서 하는 그의 모습은 굳이 멀고 험한 길로 나아가는 그의 삶과 닮아있다. 아름다운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