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건망증 - 파트리크 쥐스킨트

 

이규섭


 최근에 인터넷에서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쓴 글 하나를 보았다. 글의 요지는 책을 읽는 이유가 지식을 쌓는다거나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폭을 넓히고 생각을 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맞는 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많은 공감이 되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독서의 중요성은 강조되어 왔다. 독서가 유희의 일부였던 시절에서 벗어나, 더 재밌고 편리한 것들이 가득한 요즘 세상은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있어 옛 시절보다 책으로 눈길을 돌리기는 쉽지 않음에 분명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최근 저는 책은 안 읽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많은 글들을 보고 있는데요.’라던가, ‘TED 같은 참신한 생각을 공유하는 유명 강의들을 많이 보면 책 읽는 거랑 비슷한 거 아닌가요?’라고 반문하는 대학생들에게 그래도 종이로 된 책은 뭔가 다른 게 있어요.”라는 약장수 같은 대답을 하는 것 보다는 납득할 만한 대답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기억력이 뛰어난 편은 아닌 것 같다. 예전에 배운 내용은 너무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 뛰어난 친구들이 많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들이 기억하는 예전의 교육과정들을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창 독서 습관에 대한 회의감에 빠졌던 적이 있는데, 이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말을 할 때 책의 내용을 끌어오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기억하고 즉석에서 꺼내온 다는 사실이 경이로운 것이다. 한때는 그런 내세우기식 표현법을 하찮게 여기기도 했지만,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들였을지를 생각하면 존경을 표하게 된다. 반면 나는 어떠한가. 다양한 책을 읽었어도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니, 도대체 여지껏 읽어온 책들이 내게 주었던 것들이 무엇인지 돌이켜 보았을 때, 그건 결국 A4용지 몇 장의 도서 대출 목록표 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누군가에세 내세우기 위해 책을 읽는게 아니라고는 하지만, 책을 읽지 않는 친구와 비교해 생각의 깊이나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전혀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도대체 독서에 의미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럼 난 뭘 위해 책을 읽어온건가. 그저 내 기분이 그러했듯 단순히 비생산적 오락에 그쳤던 것일까.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 소설 중 문학적 건망증이라는 작품이 있다. 나는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면 가벼운 마음으로 이 단편을 다시 읽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 책을 펼쳤다.

 내용은 단순하면서 명료하다. 주인공이 책을 읽으며 그 내용에 몰입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깨닫고, 또 고민하는데 그때마다 그 내용을 누군가가 메모해 놓은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때로는 생각조차 못한 생각들이 적혀 있기도 했다. 그렇게 긴장된 마음으로 하나씩 더듬어 가다 말미에 이르러서야 그는 그것이 자신이 기록해 놓은 것임을 깨닫는다. 단순한 내용을 긴장감 있게 서술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나도 참 단순한 사람인 것이, 이 소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하던 고민이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멍청이가 아님이 증명되었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독서라는게 원래 다 그런거라니 나도 다시금 책을 읽어도 되겠구나 싶어진다. 그렇게 다시 책을 집어든다.

     

 사람들은 자꾸만 책을 읽는 것에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책을 읽기 싫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고, 나처럼 도중에 회의감을 느껴서 일지도 모르고, 다른 누군가에게 독서를 권유하기 위해서일수도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모두가 알다시피 독서는(그것이 픽션이든, -픽션이든) 일종의 간접경험이다. 경험이 그 하나의 사건만으로 한 사람의 개성이 되지는 않더라도, 그러한 크고작은 경험들이 모여 그 사람을 이루는 일부가 되듯이, 책을 읽는다는 것 역시 때로 그 행위 자체에는 의미가 사라질지 모르나, 적어도 그것이 라는 사람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설령 그 책의  모든 내용이 기억나지 않더라도, 그 책의 내용과 교감하는 과정에서 내면의 가치관들은 조금씩 변형되고 때로는 축적되어 갈 것이다. 그러니 그냥 지금처럼 읽으면 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설레임을 안고.

 나는 여지껏 스펙을 쌓기 위해 책을 읽어온 것이 아니었고, 자기계발을 위해 책을 읽지도 않을 것이다. 정보가 넘치는 시대인 만큼 정보는 인터넷으로 마음껏 얻을 수 있다. 애초에 오늘날 대부분의 정보는 종이 속에 있지 않다. 어차피 다 잊어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는 것이 즐거운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